TRPG/비구름
영상12:00
딸기먹고싶어라
2026. 3. 26. 23:20
날씨는 맑고, 바람은 북북서에서.
구름은 당신 걸음의 딱 반절만큼 느리게.
뭉게구름 아래, 건물 옥상 위, 정오. 반짝이는 여름의 한중간입니다.
고개를 들면 청명하니 푸른 하늘.
보도블럭 위에 붉게 흐드러진 핏물.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당신을 홀로 마주봅니다.
당신, 온 세상이 여름인데 당신 혼자 너무 차가워요.
당신을 사랑하기엔 너무도 더운 계절입니다.
오늘은 노운, 당신이 천 번 하고도 백 스무번째 죽은 날입니다.
뭉게구름 아래 선 가로수는 가지마다 맺힌 녹음을 드리우고,
어디선가 차르르, 환청처럼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훑어내리는 자리마다 흐드러지는 머리칼을 내리누르며 시선이 닿는 곳은,
보도블럭 위 붉게 번진 핏물.
그리고 그 개화의 시작점인 당신, 노운.
이미 숨이 끊어졌을 것이 분명한, 도로가 붉어질수록 희어져만 가는 당신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 눈을 감습니다.
정오를 가리키는 여름 하늘이 잘못된 꿈처럼 아득합니다.
오늘은 노운, 당신이 정확히 천 번 하고도 백 스무 번째 죽은 날입니다.
눈을 뜹니다. 익숙한 방 안입니다.
당신은 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달력에 적힌 날짜는 여전히 앞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겠지요.
지금은 노운이 죽던 날, 그 정확히 24시간 전의 정오입니다.
몇 번째의 정오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 라는 의문은 필요없겠지요.
노운이 죽을 때마다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오기를 택했던 것은 아비드, 당신이니까요.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변함없이 죽어가는 노운,
그 노운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끝도 없이 시간을 돌리고 있는 당신이 아닙니까.
휴대폰을 보면, 문자가 와 있습니다.
노운으로부터 온 문자입니다.
아비드, 당신은 몇 번이나 이 문자를 받았을까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당신의 죽음에 나는 이미 닳아 버려서,
닳지 않고 아직까지 오롯한 것은 당신을 사랑했다는 기억 하나뿐이라서.
매마른 마음에 담기에는 당신과의 추억들이 너무나 애달파 감히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답장을 하고 휴대폰을 엎어 내려둡니다.
커튼 틈새로 햇살이 비쳐드는 여름.
햇빛 젖은 바람 사이로 건조한 한숨이 낮게 깔립니다.
이게 대체 몇 번째 만남인지,익숙한 손길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면 전화 벨소리가 울립니다.
노운입니다.
날씨, 좋지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몇 번이나 봤을지 모르는 여름의 푸르른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단풍은 언제쯤 들까요, 아니.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당신은 몇 번이나 더 이 여름하늘만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더 이상 당신이 볼 수 있는 단풍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노운, 오로지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의 선택이니 괜찮습니다.
당신이 없는 가을을 보내느니 차라리 당신의 손을 잡고 영원히 이 여름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으니까요.
천 번도 더 전부터, 맨 처음 시간을 되감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렇게 정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어째서인가요.
아마도 목덜미를 태우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일 겁니다.
이 계절은 너무 덥잖아요.
노운, 당신은 언제까지 이 여름에 머물러 있을 건가요...
생각이 많아 걸음이 느린 당신과는 다르게, 전화 너머의 노운의 목소리는 여름 햇살처럼 하기만 합니다.
이 계절이 당신을 닮아서, 그래서 다른 계절로 넘어가지 않아도 당신은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요.
멍하니 듣고 있다 보면, 일방적인 통화는 어느새 끝을 향합니다.
사랑해, 하는 작은 속삭임과 함께, 전화가 끊깁니다.
노운이 불러준 주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공원입니다.
작고 고즈넉한 공원은 꽤나 풍경이 아름다워서,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공원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시야에 작은 신문 가판대가 잡힙니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96 |
| 판정결과: | 실패 |
(실눈이라 그런가)
열기와 아지랑이 때문에 놓여 있는 신문들의 글자가 흐릿합니다.
오늘 날짜의 신문이네요.
'■■ 급발진 사고, 사■자 1명 발생'
'...시 외■의 ■■■■에서 구조■ 붕괴, 지나■■ 행인 덮쳐...'
'...시 추락사 사건, ■■ 건물 보수 ■요성 강조'
오늘도 세상은 잘도 돌아갑니다.
당신이 조금 더 능력있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을 되돌리며 저 사고에 휘말린 사람들도 모두 구해줄 수 있었겠지만, 당신은 노운 하나를 구하기에도 벅찹니다.
그 수많은 반복 동안 노운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했는데, 누구를 구하며 영웅 행세를 하겠어요.
외면하듯 지나는 걸음이 조금 빨라집니다.
가판대에 걸린 유리 풍경이 오색 찬연한 그림자를 기울이며 잘그랑, 소리를 냅니다.
뭉게구름은 흘러가고,
저 먼 곳에서는 매미 울음소리가 학교를 마친 아이들의 종소리처럼 울려퍼지는 웃음소리에 화음을 넣고,
열기 가득한 여름의 바람에 가로수들은 파도처럼 유연히도 휘어집니다.
물방울을 닮아 걸음마다 튕기어 흩어지는 녹음을 밟고, 노운, 당신에게 발걸음을 내닫는 이 순간이 모든 영원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여름입니다.
공원에 도착하면, 익숙한 풍경입니다.
천 번이 넘는 되돌림 동안, 몇 번이나 이 공원에 왔을까요.
이제는 제 집 앞마당처럼 훤히 꿰고 있는 곳이지만...
노운에게는 언제까지나 처음일 테니까요.
아, 때마침 저 멀리서 당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입니다.
내리쬐는 햇살에 손차양을 하고 외치는 그 모습이, 어쩐지 문득.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시감이 듭니다.
당신, 그렇게 밝게 웃고 있는데 어째서 미소에 그늘이 드리웠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건만, ... 양지바른 꿈결처럼 웃어 줘요.
그래야 그 미소에 홀려 내가 다시 한 번 당신과의 하루를 시작하지요.
다시 한 번 끝없는 여름에 뛰어들지요.
형이랑 같이 이 공원에 와 보고 싶어서...
어때, 마음에 들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노운은 당신의 손에 음료수를 하나 쥐여 주며 맑게 웃습니다.
뽑은 지 시간이 조금 지났는지, 캔 표면에 송글송글 맺혔던 물방울이 영글어 팔목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여기, 꽃밭도 있고, 분수대도 있고...
언덕에서 보는 풍경이 예쁘기로 유명한가봐.
꽃밭, ...꽃밭인가요?
시원한 향이 가득 밀려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시야 가득히 만개한 로즈마리 꽃이 잘게 흔들립니다.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5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성공:
이 꽃밭에도 몇 번 온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다양한 여름꽃이 심겨진 평범한 꽃밭이었는데요.
이번엔 조경을 바꾸기라도 한 걸까요?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62 |
| 판정결과: | 실패 |
로즈마리 꽃에도 꽃말이 있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 여름이구나.
개화한 꽃만큼이나 흐드러지게 웃는 노운의 옆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당신, 나는 당신의 그 미소를 보기 위해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렸습니까.
그 미소를 몇 번이나 보고, 보고 또 보았기에 당신을 놓지 못하고 또 이렇게 시간을 돌아 당신이 웃는 계절에 도착해 있습니까.
수없이 짓이겨진 나의 여름은 로즈마리 향기가 화하게 짙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너무 달달한 것보다 이 편이 더 나은가?
(눈 깜박이며 바라보다가... 손 뻗어 볼 콕 찌른다.) 형 바보.
앞으로도 오래오래 같이 있어야지. 그치?
투명한 물줄기를 내뿜고 있는 분수대입니다.
정교하게 조각된 뱀이 제 꼬리를 문 채 분수대를 휘감고 있습니다.
공기 중에 산란한 물방울이 아지랑이처럼 무지갯빛으로 부서져 흩어집니다.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비는 사람도 있네요.
당신도 도전해 볼 건가요, 아비드?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74 |
| 판정결과: | 실패 |
(우울)
당신의 손에서 날아간 동전은 아쉽게도 뱀 조각의 머리를 맞고 튕겨나옵니다.
노운이 동전을 주워 다시 건넵니다.
동전을 내 손에 쥐어 준 당신, 그저 웃습니다.
손에 남은 온기가 어쩐지 시렵습니다.
지금은 여름인데,
여름인데도.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형 응원해!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67 |
| 판정결과: | 실패 |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2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당신의 손을 떠난 동전은 멋들어지게 분수대 안으로 들어갑니다.
드디어 성공이네요.
소원을 빌어요, 아비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서.
눈을 뜨자, 당신을 바라보던 노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집니다.
손을 내밀며 묻습니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감싸쥡니다.
그래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게 몇 번째든, 앞으로 몇 번을 더 반복하게 되든 지금은 당신과 함께 있는 순간인걸요.
박제된 하루 속에서, 나는 아직도 당신을 애정하여 잡은 손을 놓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꽤나 한적했었는데.
어느새 사람이 꽤나 많아졌습니다.
인파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어깨에 떠밀린 노운, 중심을 잃습니다.
넘어지는 찰나가 영원처럼 느릿합니다.
당황한 얼굴의 당신. 눈이 마주칩니다.
손을 뻗습니다.
나의 손길은 영원처럼 느리고, 당신이 떨어지는 속도는 찰나처럼 빨라서,
당신을 잃을까 두려워서, ...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4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늦지 않게 당신을 끌어당겨 품에 안습니다.
당신, 아직 여름해가 저물지도 않았잖아요.
다시 하루를 시작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품에 안긴 노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아비드를 살피며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두려워하는 것도 같습니다.
당신, 상처 하나 남지 않은 나를 걱정하는 당신이 몇 번이나 내 눈 앞에서 죽었는지,
몇 번이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숨이 끊어졌는지, 알고 있나요.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얼굴 앞에 당신이 지나온 수많은 죽음들이 겹쳐집니다.
나를 더 이상 보지 않는 당신, 내게 손을 뻗지 않는 당신, ...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멀리까지 풍경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입니다.
투명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입니다.
흐릿한 시야를 되돌리기도 전에, 노운이 손을 잡아 이끕니다.
형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나는 이 풍경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신보다도 더, 어쩌면 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더요.
그렇지만 노운, 당신이 아름답다고 했으니까요.
일렁이는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는 세계의 풍경이잖아요.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공원을 전부 둘러보고 나자, 벌써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저무는 태양 빛에 금빛 물들인 미소로 당신이 나긋하니 인사합니다.
머뭇거리다가 덧붙입니다.
그 말만 남겨 놓고 어스름 깔린 거리로 사라져 버리는 당신,
이 자리에 남은 것은 당신과, 발치에 굴러다니는 사랑한다는 말, 그 한 마디 뿐입니다.
나는 그 말을 주워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담고 서서히 몸을 돌립니다.
이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땅거미 진 저녁 공기는 뭉근하니 습기가 묻어납니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쯤은 가벼워진 것도 같습니다.
집에 들어오자 피곤이 몰려옵니다.
평범한 하루의 끝입니다.
몇 번째 끝인지는, 굳이 세어보지 않겠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끝나지 않을 푸른 밤의 손길에 이끌려 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생각보다 더 금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
...
...
나는 창가에 서 있습니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릅니다.
이상합니다. 그러면 내 뺨을 적시고, 신고 있는 구두코에 떨어져 얼룩지는 이 비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아니, 이 비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게 이상합니다.
당신이 없는데도 세상이, 창밖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잖아요.
서쪽으로 해가 저물고, 동쪽에서 바람이 불고, 남쪽에서는 가을이 오고 있잖아요.
그래선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 나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어요.
모든 계절을 합친 것보다도 무거운 나의 당신, 사랑하는…
...
...
...
꿈에서 깨어납니다.
숨이 막힙니다.
분명히, 분명히 이곳은 집 안인데.
익숙한 곳인데.
생경한 바닷속처럼, 폐부를 물이 한가득 채운 것만 같습니다.
이상한 꿈.
꿈이 기도를 틀어막아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뱉어내는 숨이 새파랗게 방 안을 물들입니다.
아, 당신.
나의 당신.
반복되는 하루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건가요.
꿈에까지 나와 내 목을 틀어쥐고.
내 모든 하루를 가져가서, 이제는 만족합니까, 당신.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55 |
| 판정결과: | 실패 |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리면 이미 해는 떠올라 바깥이 찬연합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흐릅니다.
노운에게서 부재중 전화 몇 통과 문자가 와 있습니다.
다급하게 나갈 채비를 마치고, 구르듯이 집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열기를 머금은 도로에 발을 내딛자 불안한 예감이 무더위와 함께 덮쳐듭니다.
노운, 이번에도 또 당신을 구하지 못하면 나는 어떻게 할까요.
아, 나의 노운. 사랑하는 사람....
...저 멀리 공원으로 건너가는 횡단보도 너머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입니다.
노운입니다.
아직 무사했어요. 오늘은 정말로 이 계절의 끝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지고, 당신을 향해 발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트럭 한 대가.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노운. 왜 움직이지를 않나요. 두려움에 발이 굳었나요?
하지만 그 표정은, 그 시선은, ...나를 보며 웃지 말아요. 어째서, ...
쾅, 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살이 뭉개지고 한 목숨이 끊어지는 소리.
...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붉은 핏물도 퍼져나갑니다.
정오의 햇살은 뜨겁게 내리쪼이고, 아스팔트에 흘러 고이는 눅진한 피비린내에 나는 다만 아찔하니 눈을 감습니다.
오늘은 노운, 당신이 정확히 천 번 하고도 백 스물 한 번째 죽은 날입니다.
눈을 뜹니다. 익숙한 방 안입니다.
당신은 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달력에 적힌 날짜는 여전히 앞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겠지요.
지금은 노운이 죽던 날, 그 정확히 24시간 전의 정오입니다.
몇 번째의 정오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목에 깊숙히 걸린 숨을 토해냅니다.
노운, 왜 피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분명히, 발을 멈췄습니다.
나를 보며 웃었습니다.
설마 그 많은 죽음들은 전부 당신의 선택이었던 건가요.
나는 끝도 없이 자살하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끝도 없이 시간을 돌렸던 건가요.
커튼이 드리워진 창밖은 여름, 여름, 끝도 없는 여름입니다.
나는 이 빌어먹을 계절이 지겹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습니다.
...휴대폰이 울립니다. 노운입니다.
일단은, 나갈 채비를 합니다.
당신, 이 계절이 무엇이 그리도 무서워 모든 하루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죽음을 택했는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노운을 만나야만 합니다.
만나서, 돌아올 리 없는 대답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돌아가는 시간에 갇혀 살아가는 당신.
그런 당신을, 일단은 만나야겠습니다.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면 바깥은 여름,
끝나지 않는 이 계절이 나는 정말로. 싫습니다.
빼곡히 채워진 서가, 그 사이를 관통하는 오후의 햇살과 인력을 잃고 느릿하니 공중을 부유하는 황금빛 먼지들.
발소리를 낮춰 도서관에 들어서면, 당신의 손을 뒤에서 잡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익숙한 손길, 노운입니다.
당신에게 웃어 보이며 검지손가락을 세워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합니다.
왜 그러는 거야?
...
......
(호다닥 가서 볼에 쪽 해줬다. 활짝 웃으면서.)
사랑해, 형.
그 말만을 남긴 노운은 야속할 만치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가들 사이로 사라져 버립니다.
홀로 남은 당신, 느지막한 오후의 적막만이 당신 주변을 감싸고 있습니다.
아비드, 노운이 돌아올 때까지 책이라도 읽고 있을까요.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91 |
| 판정결과: | 실패 |
서가 사이에 단 한 권, 제목이 없는 검은 책이 꽂혀 있습니다.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나는 책입니다.
펼쳐볼까요?
책을 펼쳐 보면, ...모독적이고 광기 어린 신화 생물들, 형언할 수 없이 아득한 주문과 저주와 그 어떤 것들.
닿아서는 안 될 신화의 편린을 접한 당신.
| 기준치: | 49/24/9 |
| 굴림: | 3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책을 덮으려던 순간, 한 문단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열쇠이자 문인 분, 길을 여는 자.
모든 시간과 공간에 잇닿은 위대한 그 분의 힘을 빌리면 인간의 몸으로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대가는 되돌리는 시간만큼의 기억, 표식은 힘을 쓰는 자의 생명.
생명이 끊어지면 시간이 돌아가고, ...누적된 시간은 세계에 쌓여 세계를 무너뜨릴 것이니.
...이상합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기억을 잃은 적이 없는데.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단 한 번도 기억을 잃은 적 없이, 노운을 되살리기 위해서, ...
아비드, 이제껏 시간을 돌려 온 것은,
이 끝없는 계절을 이어 온 것은 정말로 당신이었습니까?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69 |
| 판정결과: | 실패 |
단 한 명, 모든 하루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매번 죽어갔던 사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당신이 있지 않습니까.
당신, 노운.
당신은 어째서 매번 죽어 이 계절을 이어가고 있나요.
어째서 영원히 이 계절에 머무르고 있나요.
그랬던 겁니다. 시간을 돌렸던 것도, 이 하루를 반복하고 있던 것도, 내가 아닌 당신.
내가 구하려고 했던, 나의 노운.
당신이 이 세계의 회전축이었던 겁니다.
| 기준치: | 49/24/9 |
| 굴림: | 60 |
| 판정결과: |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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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운을 찾으려고 걸음을 옮깁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서가 사이를 달립니다.
달립니다, 당신.
한참을 달리다 보면,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노운이 서 있습니다.
입술을 열었는데, 노운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 주변에 흐트러진 책더미와 넋이 나간 표정.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습니다.
기억하고 있었어? 전부? 그 모든 순간들을?
영문 모를 말을 고해하듯 쥐어짜내 말하고, 아비드의 곁을 지나 스치듯 달아나 버립니다.
당신, 당신은 도무지 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비밀들을 끌어안고 있기에 발걸음이 그리도 무겁습니까.
당신 홀로 짊어진 것이 무엇이기에 그리 죄 지은 듯 버거워하면서도 내게는 한 자락 내어 줄 생각조차 없습니까.
노운이 사라진 자리,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90 |
| 판정결과: | 실패 |
낮익은 종이, 찢어진 책의 뒷페이지입니다.
종이에 쓰여 있던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눈앞을 휘젓는 토막난 생각들에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세계, 시간, 기억, ...몰랐더라면 좋을 것들, 알았어야 하는 것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인 당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당신. 노운.
걸음 닿는 대로 발을 옮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시야가 흐립니다.
가없이 푸르기만 한 이 계절이, 칠흑처럼 검어지도록 걸음만 옮깁니다.
무언가에 부딪혀 고개를 들었더니, 익숙한 현관입니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당신은 또 하루의 끝에 와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대로 물에 젖은 솜처럼 잠에 빠져듭니다.
도망치듯 꿈을 꿉니다.
눈앞이 흐립니다. 마르지 않는 눈물이 눈가를 적시고, 때아닌 비를 내립니다.
이 끔찍한 더위, 끔찍하게도 푸른 하늘,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
나는 이 계절이 끔찍이도 싫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당신이 있었던 마지막 계절이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젖어 흐린 가운데 고요히 누워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차가운 손을 잡고, 더 이상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부르고, 흐느끼며 고개 숙여 발원하듯 이마를 맞댑니다.
손에서 손으로 옮아와 붉게 번지는 핏물이, 모든 것이 푸른 이 계절에서 홀로 붉고 하얀 당신이 서럽습니다.
이 설운 계절에 나 홀로 울음 웁니다.
나를 두고 가지 말아요. 당신이 없는 이 계절은 너무나 차가워요.
눈을 떠요. 나를 다시 한 번 따스하게 안아 줘요.
나는 당신이 없는 이 하루를 홀로 남아 버틸 수가 없어요.
사랑하는 나의, ...
꿈, 아니. 꿈이 아닙니다.
꿈이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에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수그립니다.
귓가에 맴도는 서러운 울음 소리.
누구의 울음인가요.
누구의 기억인가요.
누구의 슬픔인가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노운.
당신 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이 세계를 돌릴 만치 사랑했던 것은, 온 생애와 마음을 바쳐 애달프게 애정했던 것은 나뿐이잖아요.
온 세계와 반복되는 모든 하루를 통틀어, 나뿐입니다.
고개를 들면 정해진 수순처럼 휴대폰이 울립니다.
노운, 당신. 오늘 나는 당신에게 들어야 할 말이 많지만, 당신은 언제나처럼 내게 내어 줄 대답이 없겠지요.
전화 너머로 전해지는 목소리에는 옅은 물기가 스미어 있습니다.
아마도 분명, 소나기가 잦은 계절이기에 그럴 겁니다.
온 하늘이 깨끗한데 어디서 비구름에 젖어 왔을까요, 당신.
나는 홀로 죽어 나를 사랑해 왔을 당신이 마냥 안쓰럽기만 합니다.
나 지금, ...집 앞에 있어.
할 얘기가 있어.
급하게 현관 밖으로 나가 보면, 길 건너 공사장 앞,
차양이 드리운 그늘 아래 서 있는 노운입니다.
당신을 발견한 노운이 걸음을 떼는 순간, 엄습하는 그림자가.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전조도 없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철골에 놀란 눈을 하다가, 당신과 눈이 마주칩니다.
선과 선이 잇닿아 겹칩니다.
마주친 시선, 뒤따르는 미소.
움직이는 입술. 입 모양으로만.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릅니다.
공기 중에 산란했던 뿌연 먼지는 내려앉으며 한껏 핏물을 머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핏물이,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쳐나온 당신의 발을 감싸안아 샛붉게 물들입니다.
당신, 알고 있나요. 정오에 짓이겨진 당신의 죽음에서는 이 잔혹한 계절과 같은 향이 납니다.
로즈마리 향기가...
로즈마리 꽃의 마지막 꽃말은, 당신의 존재로 나를 소생시키다.
당신, 당신을 으깨어 나를 살리고. 당신은 행복한가요.
대답은 들리지 않습니다. 또다시 눈을 감습니다.
오늘은 노운, 당신이 정확히 천 번 하고도 백 스물 두 번째 죽은 날입니다.
다시, 다시 눈을 뜹니다.
익숙한 방 안입니다.
당신은 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달력에 적힌 날짜는 여전히 앞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겠지요.
지금은 노운이 죽던 날, 그 정확히 24시간 전의 정오입니다.
몇 번째의 정오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당신과 내가 보내는, 마지막 정오일 겁니다.
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갑니다.
달립니다.
달리면서 노운에게 전화를 겁니다.
받지 않습니다.
다시 겁니다. 받지 않습니다.
다시, 다시, 다시....
몇 번이나 걸었을까.
노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으로 내가 먼저 당신에게 전화를 건 정오.
전화 너머로 옅은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노운이 불러준 주소는 여기서 멀지 않은 폐건물, 옥상 위입니다.
바쁘게 다리를 움직입니다.
힘겹게 달리는 발걸음 따라 뭉게구름이 흐르고, 물기 머금은 바람은 등을 밀어 앞서 나갑니다.
저 멀리서 잔향처럼 자전거 바퀴 소리가 차르르, 부서지고,
... 노운, 당신은 이 계절이 무서워 죽음을 택했던 것이 아니었군요.
이 다음의, 그리고 그 다음의 내가 없을 계절이 무서워서,
제가 영원히 죽어 나를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죽음으로 하루를 이어붙이고, 이어붙이고, 이어붙여...
완벽한 여름입니다.
노운, 당신이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어 완벽한 하루입니다.
옥상에 올라서면, 노란 빛깔의 친근한 물탱크와 초록빛 바닥.
군데군데 웅덩이가 생긴 바닥은 쪽빛 물들인 하늘을 닮아, 언뜻 로즈마리 향이 코끝을 스칩니다.
시선을 올리면 붉게 녹슬어 흔들리는 난간.
그리고 난간을 하얗게 감아쥐고 위태로이 기대선 노운.
당신을 보며 환히 웃습니다.
거기서 뭐 해, 위험하잖아....
울고 불고 형을 불러봤는데 형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영영 잃은 줄 알았어.
......그런데, 내 기억과 목숨을 대가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거야.
처음에는 형만 살려보려고 했는데 줄줄이 실패했어. 결국에는 형이 죽기 전에 내가 죽어 형이 살아있는 하루를 끝없이 반복하기로 했던 건데.
... ...
......시간을 계속 돌리면 세계가 무너질 걸 알았어. 그래도 형이 더 소중했으니까 나한테는 상관 없었어. 그런데.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많이 괴로웠지?
너를 두고 혼자 남는다는 거, 정말 할 짓이 못 됐으니까.
네가 나를 얼마나 미워했을지 혼자서 얼마나 슬퍼했을지, 전부 알 것 같아.
화 나지 않았어, 슬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을 마친 노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 표정을 알아보기 힘듭니다.
위태로이 난간에 기대어 하늘에 반쯤 몸을 걸친 양이 꼭 계절이 바뀌는 순간,
비상을 준비하는 철새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노운, 당신. 시선이 맞붙자 유언처럼 호명합니다.
내가, 형이 있는 하루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죽어도 될까.
아비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당신.
어떻게 할까요.
영원히 죽고 죽어 당신을 살렸던 그 사람이,
당위처럼 다가올 세계의 종말을 알면서도 당신 하나에 목을 매어 이 지경까지 온 그 사람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눈을 감습니다.
멸망을 기다리듯, 조용히 난간에 체중을 싣습니다.
선택의 시간입니다.
아비드, 노운과 함께, 영원히 오늘을 살아갈까요,
노운에게 당신이 없는 내일을 안겨줄까요.
나는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해.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우리 가족도 너를 아껴줄 거야. 부족할 일은 없을 거야. 게다가 다른 형과 누나들도 있잖아.
나는 형이랑 있는 여름이 싫지 않았단 말이야.
내 욕심 때문에 너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어.
노운....
나는 네가 다음 계절을 봤으면 해. 그게 내 욕심이야.
그래도 네가 네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면.
마지막도 함께할까?
당신, 나는 나 하나 보고 여기까지 죽어온 당신이 너무도 가엾습니다.
하지만 내가 없는 계절에 당신 홀로 남기는 것도 내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비드, 이 계절을 닮아 청명히도 웃습니다.
노운을 꼭 안고, 끝없이 펼쳐진 하늘로 걸음을 옮깁니다.
녹슨 난간은 저항 없이 부드럽게 기울어지고,
하나가 된 우리는 여름을 닮아 푸른 아스팔트 위로 한순간 비상합니다.
추락, 추락이라는 말은 쓰지 말아요.
아래를 향해 날아오르는 것에도 비상이란 이름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여름을 닮은 이 계절에 당신이 애정이라 이름붙인 것처럼.
조금쯤은 멋대로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 이 계절.
나는 이 계절의 더위가 빌어먹게도 싫습니다.
당신을 안아 주기에는 너무 덥잖아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푸르잖아요.
찰나의 비상 동안 허탈하게 웃습니다.
퍽, 하는 소리가 나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의식이 흐려집니다.
마지막으로, 품안에 있는 당신에게.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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